
전통적인 향수 제작 방식은 클라이언트로부터 콘셉트나 이미지를 제시받으면 조향사가 수주일에서 수개월에 걸친 조합 시험으로 조합과 수정을 반복한다. 콘셉트 결정부터 매장 진열까지 6개월에서 18개월이 소요되기도 하며 고급품의 경우 더 길어진다. 하지만 AI를 활용한 향기 창조로 향수 제조 프로세스가 더 단축되어 프래그런스 시장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뉴욕 맨해튼에 본사를 둔 테크놀로지 스타트업 오스모(Osmo)는 자두 향기 성분을 디지털적으로 해석, 재구성해 프래그런스 코드로 변환하는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향수 전문가이자 기술 스타트업에서 머신러닝 시스템에 종사하고 있는 아라벨 시칼디에 따르면 오스모가 제작한 자두 향기가 콘퍼런스에서 전시됐을 때 진짜 자두에 있는 조금 썩어가는 듯한 열감이 없고 너무 깨끗한 향기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칼디는 수 미터 앞에서도 자두 향기가 느껴질 정도로 이상하게 강한 냄새였지만 유전자 변형이었음에도 진짜 향기였다고 말했다.
오스모는 향기의 디지털화라는 기술을 고객 문의로부터 48시간 이내에 샘플을 납품하는 프래그런스 조합 서비스로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원재료가 종종 수년에 걸쳐 재배되고 조합에 수개월이 걸리는 향수 제작 프로세스를 크게 단축시키고 있다. 오스모 창업자인 알렉스 윌치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프래그런스는 겨우 10만 종류 정도라며 자신은 수백만 종류로 늘리고 싶다고 밝히고 AI를 활용한 새로운 도구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늘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래그런스 업계에 AI가 활용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며 세계적인 향료 기업은 모두 자사 파이프라인에 AI를 통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 향료 제조사인 지보단은 조향사가 조합을 정교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AI와 터치패널을 사용한 지원 도구 카토(Carto)를 도입했다.
또 세계적인 향료 기업 DSM-피르메니히(DSM-Firmenich)에서도 AI를 일상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DSM-피르메니히에서 수석 조향사를 맡고 있는 프랑크 폴클은 자신이 조향사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메일 같은 것이 없어서 팩스로 소통했다면서 그때는 조합을 손으로 썼다고 밝혔다. 이어 AI가 지닌 뛰어난 점은 규제상 우려나 안정성, 위상, 성능에 관한 문제를 AI가 관리해준다는 것이라며 이런 도구는 기술적 문제 해결에 유용하며 상상력, 감정, 직관, 인간적 요소가 필요한 창작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면서 마치 비서 같다는 말로 AI 도입에 대한 장점에 대해 말했다.
더 나아가 제품 연구소 뿐 아니라 전 세계 프래그런스 교육 현장에서도 AI가 활약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조향사 훈련을 받고 있는 헤더는 대다수가 모든 프로젝트와 의문 해결에 AI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헤더에 따르면 윗세대는 AI를 검색엔진이나 인스피레이션 보드 같은 이차적 리소스로 취급하는 반면 Z세대는 소재 선정부터 조향 조정까지 창작 프로세스 연장선상에서 AI를 활용하고 있으며 새로운 크리에이터에게 AI는 어시스턴트가 아닌 중요한 인프라가 되고 있다고 한다.
뉴욕 패션공과대학(FIT) 피에르 뷔아르 교수는 수작업으로 조합하고 각 재료에 대한 정확한 양을 파악해 직접 계량하는 작업은 사라질 것이라며 AI는 향기 제작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 향기를 민주화했다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의문도 생긴다면서 장인 기술은 어디로 갔는가 조향사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말로 AI로 인한 장점과 손실을 모두 지적했다.
일부 향수 소매업체와 향수 컨설턴트는 AI에 의한 향수 제작에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다. 뉴욕 프래그런스 소매기업 스떼엘(Stéle) 공동경영자인 매트 벨랑제는 일부 브랜드는 조향사 주도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제너레이터를 사용해 기존 작품을 복사하고 있다며 프래그런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의 여정을 결정하는 데 시간과 용기, 그리고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건 버튼을 눌러 즉시 무언가를 얻는 것과는 다르다며 인간 조향사가 향수를 만드는 의의를 강조했다. 또 조향사 마이클 노르드스트란드는 오스모가 AI의 투명성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조향사가 주도권을 쥐고 향수에서 AI 위치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업계가 이들 손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