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왕조는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250년 이상 오랫동안 지속됐다. 하지만 200년 가까이 번영을 이뤄온 청왕조는 19세기 중반부터 급격하게 쇠퇴하며 1912년 붕괴해버렸다. 왜 청왕조는 급격하게 붕괴를 맞이하게 됐을까.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위치한 연구 조직인 CSH(Complexity Science Hub)가 이를 분석해 눈길을 끈다.
청은 중국 동북부 만주에 건국한 후금이 전신이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1644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중국을 지배한 청은 차, 도자기, 생사 등을 수출해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18세기 말부터 경제적 기세에 눈을 돌린 유럽 국가에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됐다. 차와 도자기를 청에서 수입해 무역 적자에 빠져 있던 영국이 아편을 청에 수출하면서 청의 국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를 우려한 청왕조는 영국 상인이 소유한 아편을 몰수, 처분하고 영국과의 사이에서 아편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민중이 압력을 높이는 외국과 청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 결과 혁명이 격화되며 1911년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성립이 선언됐다. 이어 1912년 청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며 청왕조는 끝을 맺었다.
CSH는 청왕조가 왜 붕괴에 이르렀는지 원인을 연구했다. 연구팀은 청왕조 붕괴에 대해선 환경 재해나 외국 진출, 기아, 폭동 등 다양한 요인을 꼽아왔지만 설명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CSH에 따르면 3가지 요소가 사회적 긴장을 극적으로 높였다고 한다.
첫째는 인구 폭발. 청에선 1700년부터 1840년 사이 인구가 대략 4배 증가하는 인구 폭발이 일어났다. 그 결과 1인당 토지가 감소하고 농촌에선 빈곤화가 진행됐다.
둘째 엘리트 경쟁 격화. 인구 폭발에 따라 관료 지망자가 급증했지만 이에 대해 수여되는 최고 학위 수는 감소해 1796년 최저치에 이르렀다. 중국 관료 사회에선 학력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관료 지망자 수가 증가하는 한편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틀이 줄어 관료가 될 수 없는 채 떨어진 전직 엘리트 지망자가 급증했다.
셋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 증가. 국민 1인당 생산성이 저하되고 주요 수출품이던 은 매장량이 저하되는 동시에 아편 수입량이 증가하고 청 무역 적자가 증가한 것으로 국가 재정 부담이 증대했다. 국가 성장에 의해 일어난 인구 폭발이 관료 시스템 붕괴와 국민 생산성 저하를 초래해 국력이 크게 피폐한 곳에 큰 반란을 일으키기 쉬운 상황이 완성됐다는 주장이다.
CSH에 따르면 청에서의 사회적 긴장은 1840년부터 1890년 사이 벌써 정점을 맞이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청왕조가 시도한 해결책 대부분은 근시안적인 것으로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관료 수용 틀을 끌어올렸지만 중요한 모집 틀은 늘지 않았고 이게 사회적 긴장을 한층 더 높이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CSH는 청왕조 붕괴 분석 이유에 대해 역사적 과정에서 현대와 미래를 위해 소중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다면서 전 세계 많은 국가가 청왕조와 비슷한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장치 의사 결정자는 이를 위험 신호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불평등 확대와 기회 감소 영향은 더 장기적 범위에서 진행되며 인식하기 어려워진다는 것. 압력을 완화하기 위한 장기적인 비전과 목표를 좁히는 전략이 없으면 많은 지역이 청왕조와 같은 길을 따를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