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중국, 일본 등 다양한 국가에서 제조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독일에서도 기술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런 독일에서 왜 반도체 산업이 실패로 끝나버리게 됐을까.
1980년대 후반 독일민주공화국 줄여서 동독은 반도체 국산화라는 엄청난 과제에 전력으로 임했다. 이 반도체에 대한 집념은 실패로 끝나고 이를 위해 소비된 엄청난 자금은 결국 국가 경제를 파괴하게 된다.
1950년대 동독은 전쟁으로부터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동독은 나치 독일로부터 강력한 산업 기반을 계승했지만 인구는 서독 3분의 1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여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 SED는 중앙집권적인 국가 계획을 도입했다. 이런 비현실적인 노동 할당은 국민으로부터 불만을 샀고 1953년에는 전국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켜 소련이 전차와 병사를 보내 파업을 폭력으로 진압한다는 사태까지 발전했다. 이는 동베를린 폭동이라고도 불리며 동독에게 영구적이고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이민 문제로 이어졌다.
동독에선 현명한 국민이 일관되게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런 국민을 동독에 머물게 하기 위해 SED는 높은 기술력에 의한 안정된 미래를 제시했다. 이 때문에 당시 동독은 소련 이상으로 경제적 활력과 빛나는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한 길로 정보기술에 중점을 두게 된다.
당시 SED 엘리트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할 수 있을지 기술 경쟁에 휘말렸다고 봤다. 당시 SED 제1서기였던 월터 울브리히트는 기술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따라잡고 추월하는 걸 목적으로 산업 변혁을 호소했다. SED는 이 산업 변화를 실현하려면 컴퓨터 산업 번영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이런 우수한 컴퓨터를 생산하려면 동독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기술을 배우고 습득해야 했다.
미국에서 게르마늄 트랜지스터가 발명된지 4년이 지나지 않아 동독은 독자적인 1세대 반도체 제조에 착수했다. 1세대 반도체는 1952년 베를린 근교에 통신 기술용 전기 부품 공장에서 개발이 시작됐다. 이 시기 동독 반도체 기술은 서독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한다. 덧붙여 서독 첫 반도체 공장은 1952년 지멘스에 의해 건설됐다.
동독 반도체 개발은 물리학자인 마티아스 팔터가 이끄는 74명 작은 팀이 담당했다. 물론 이 팀 규모는 1960년대에는 625명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팔터는 뛰어난 물리학자였지만 팀 리더나 매니저 자질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개발팀은 산업계와 학술계 협력 체제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
더구나 동독은 반도체 개발팀에 원래 부여해야 할 지원을 하지 않았다. 행정 그 중에서도 회계 관계자는 반도체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 영향으로 클린룸에서 정전기 축적을 막기 위해 사용하는 펠트 재질 슬리퍼 구입이 인정되지 않은 에피소드도 있다. 이런 자원 부족이 동독 반도체 산업이 초기에 접한 문제라고 한다.
동독은 반도체 개박 초기 앞서 언급한 문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안정된 개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선 어떤 형태든 기술 이전이 필요했다. 물론 운 좋게도 소련은 전 세계 컴퓨팅 기술 리더였다. 하지만 동독의 정치적 후원자였음에도 소련은 동독에 대해 이상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1958년 개발팀 직원이 기술 교류를 위해 소련을 방문했지만 1년 뒤 귀국한 다음 직원들은 한정된 협력 밖에 얻을 수 없었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유는 당시 소련이 개발한 컴퓨팅 관련 기술 대부분이 군사용으로 개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이런 기술을 동독으로 기술 이전해 서쪽으로 망명하는 과학자를 통해 이런 기술이 유출된 우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1959년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당시 소련 후르시초프 서기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소련으로부터 동독에 기술 어드바이저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대응하는 형태로 소련은 기술자 3명을 동독에 보냈다. 하지만 이들 업무를 서방 국가가 방해했다고 한다. 따라서 동독은 서방 국가 기술에 눈을 돌려 반도체 제조 방법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라이선스 계약이나 장비 구입 등 모든 걸 빌릴 방침으로 전환한다.
당시 미국은 반도체 기술에서 세계적인 리더였지만 반도체 기술은 분명히 군사적 응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방 국가는 소련과 관련 국가에 대한 기술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대공산권 수출 통제위원회 COCOM으로 미국은 이 COCOM 규제에 가장 충실했다.
하지만 모든 서방 국가가 COCOM 규정에 충실한 건 아니다. 1959년 동독 대표단 10명이 영국을 방문해 많은 반도체 공장을 시찰하고 관련 기기를 구입했다. 구체적으로 대표단은 영국 필립스, 지멘스, 톰슨휴스턴일렉트릭 공장을 시찰했다.
영국 방문은 큰 성공을 거두고 동독은 산업 수준 반도체 제조에 대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더구나 동독은 당시 첨단 기술인 저주파 트랜지스터 장치 구입에도 성공했다. 그런데 영국 기술 시찰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반도체 산업 지위는 굳어지지 않은 채 동독 내 우수 기술자는 서독으로 계속 유출됐다.
이 와중에도 1958년 동독 반도체 개발팀은 게르마늄 다이오나 트랜지스터 10만 개, 정류기 등을 생산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런 제품 중 98%는 수명이 다하기 전에 폐기됐다.
한편 미국에선 1958년 트랜지스터 2,780만 개가 생산되고 1960년에는 생산량은 1억 3,100만 개까지 확대됐다. 그 뿐 아니다. 1961년 텍사스인스트루먼트가 집적 회로 판매를 시작해 반도체 업계에 큰 충격을 가져온다. 이 놀라운 발명으로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서 기술적 주도권을 크게 늘릴 수 있게 됐다.
동독 관계자는 1959년 4월말 미국과 서독 등 산업과 비교하면 자국 기술적 후진성이 높다며 이 후진성은 적어도 1961년까지 감소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어 갈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더구나 1960년 실시된 또 다른 검사에선 반도체 생산 후진성이 더 많은 항목에서 확인된다. 당시 동독 노동자는 측정기보다 경험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다양한 공장 라인이 서로 협력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국에 제출된 메모에선 동독이 기술적으로 5∼6년 늦다고 밝혔지만 정치색이 강한 경제위원회에 제출된 분석에선 기술 지연이 3∼4년 정도라고 축소 보고하기도 했다.
1960년까지 350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가 서쪽으로 유출되며 동독은 급속히 고령화되어 갔다. 두뇌 유출을 제한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로 끝나면서 1961년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건설한다. 베를린 장벽에 의해 동독이 서방에서 수입하던 기술 일부도 수입할 수 없게 되며 기술 격차를 메우는 게 과제가 됐다.
동독은 처음에는 소련에 접근하지만 이 시기 양측 관계는 긴박했다. 소련은 동독의 전문성 부족을 비판하고 동독은 소련이 생산량 부족을 메우는 데에만 동독을 이용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따라서 소련은 동독에 석유를 공급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고 컴퓨터 기술 공유에도 발을 조금씩 뺀다. 또 1965년 동독은 소련과 상당히 불리한 무역 협정을 맺게 됐다. 소련과의 관계가 이런 상황이었던 만큼 동독은 1963년 신경제계획이라는 새로운 구상을 내세운다. 이를 통해 관료가 아닌 산업 그룹이 자금 사용법을 직접 결정할 수 있다. 또 이 구상에 의해 반도체 제조 같은 기술 부문이 경제에서 지위가 높아져 연구개발비는 1959년부터 1963년에 걸쳐 3배 이상이나 증가했다. 1965년에는 동독이 생산한 전자기기 40% 가까이가 반도체가 됐다.
4년 뒤인 1969년에는 반도체 생산액은 4배까지 늘었다. 이들 대부분은 라디오, TV, 냉장고 같은 소비자를 위한 전자 제품에 사용됐다. 1971년에는 반도체 생산액은 5억 3,500만 마르크에 도달했고 그 해 마침내 동독은 집적회로 생산을 시작했다.
다시 말해 울브리히트의 개혁은 일정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1960년대 후반에는 좌절되게 된다. 정책 계획에서 불평등으로 인해 컬러 TV는 널리 보급됐지만 칫솔과 화장지 같은 소비재는 부족했다. 1971년에는 SED 제1서기가 울브리히트에서 호네커로 교체된다. 이에 따라 동독 반도체 투자는 다시 보수적으로 바뀌어 연구 개발 투자도 축소됐다.
그 밖에 스파이와 슈타지도 동독 반도체 산업에 영향을 미쳤다. 1967년 동독 전기공학 관계자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 집적회로를 갖고 동독 전자기기 기업을 방문해 집적회로를 정확하게 복사하도록 지시했다. 슈타지로 알려진 국가보안부는 1950년대부터 과학 기술 스파이 활동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과학적 지식 획득에서 특정 기술 획득으로 이행해 나갈 것이다. 덧붙여 슈타지에 의한 기술 획득 대부분은 서방 정보 제공자를 통해 이뤄졌다.
슈타지에 정보를 제공한 인물 중 1명은 서독에 근무하던 한 인물은 28년 이상 기술 기밀을 동독으로 빼돌렸지만 잡히지 않았다. 슈타지는 원하는 자료 목록을 넘겨주고 이 인물은 이를 확보해 동베를린에서 유일하게 서베를린 지하철이 지나가는 역에서 슈타지에 건넸다고 한다.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면 슈타지는 이 기술을 풀고 라벨 등을 떼어내 어디에서 왔는지 특정할 수 없게 하고 나서 동독 기업에 건넸다.
196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은 시스템/360을 복사해 독자 컴퓨터 제조에 임했다. 이런 노력은 여러 컴퓨터를 조달할 뿐 아니라 IBM 사내에 작업자를 배치해야 했지만 슈타지가 이를 수행하고 있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슈타지는 해외 기록 대부분을 폐기했기 때문에 이 기관에 의한 해외 기술 취득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동독에 의한 기술 도용이 동독 연구개발비를 수조 원 규모 절약할 수 있게 도와 서방과의 격차를 메우는데 기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만 동독 산업계가 훔친 정보를 흡수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도 분명하다. 슈타지는 기술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스파이였기 때문에 잘못된 물건을 훔치는 경우도 자주 있었던 모양이다. 또 서방에서 금수조치 강화도 동독 산업 발전을 방해하게 됐다. 그리고 슈타지가 훔친 서방 국가 제품도 점차 낡아지고 손에 넣기 위한 비용도 높아졌다고 한다.
금수조치에 의해 서방은 슈타지를 속이기 쉬워져 제품 가격을 30%에서 80% 혹은 100% 인상하기도 했다. 이런 제품 가격 인상도 동독 연구개발 예산 압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 발전에 의해 동독 기술자에선 복제하기 어려운 반도체가 등장하게 된다. 1976년에는 집적회로의 물리적 형상만으로 제조 방법 비밀을 아는 건 어려워지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수출 금지 강화, 오일 쇼크, 서방 국가의 대량 차입, 생산성 저하와 경쟁력 악화 등 동독 입장에선 고난의 시기였다. 국가계획위원회 측은 반도체에 대한 투자가 국가 경제를 정체에서 구할 것이라고 호네커 서기장을 설득했다.
1981년 동독은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개발로 서방에서 아직 7∼10년 늦었기 때문에 호네커는 1985년까지 반도체 대부분을 국산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현실적인 기술 경제적 견해는 점차 반도체가 공산주의로의 이행 전제 조건이 되어 서방으로부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사고로 변화하는 등 독배가 든 강박관념으로 바뀌어갔다. 당시 동독 내 재원은 부족했고 COCOM에 의한 수출 금지 조치는 아직 실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은 서방 기술을 훔치기 위해 스파이 공작이나 활동에 더 깊게 물두했다.
1985년 슈타지 역사상 최고 스파이 중 하나였던 겔하르트 론네베르거가 도시바와 기술 이전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이는 2,500만 마르크로 동독에 256KB 메모리 칩 설계도와 제조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획기적인 계약이었지만 1987년 도시바가 잠수함 프로펠러 장치를 소련에 판매하고 있던 게 발각되자 동독과의 계약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한 동독을 증거 은폐를 위해 슈타지에게 95% 환불을 요구했다. 론네베르거는 이에 동의하고 1988년 7월 도시바 직원 앞에서 칩 설계도를 태운다. 하지만 그가 파기한 건 복사한 설계도였다고 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독은 여전히 기술적으로 서방에 뒤쳐져 있었다. 1987년까지 미국에선 직원 1,000명당 컴퓨터 지원이나 설계, 제조 시스템 215개가 도입됐고 서독에선 111개였다. 이에 대해 동독은 직원 1,000명당 컴퓨터 관련 시스템 수는 불과 8개였다고 한다.
1986년 동독 정부는 새 프로그램을 시작해 3년 이내에 초대규모 집적회로를 개발하고 동독을 첨단으로 이끌겠다는 목표를 삼았다. 이를 위해 1986년부터 1990년에 걸쳐 반도체 연구개발에 140억 마르크 자금을 투입했다.
당시 동독 연구개발 전체 예산 20%로 이미 많은 부채를 안고 있던 동독 재정을 압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당시 동독에선 40만 명이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 제조나 연구 개발, 지원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는 산업 인수 8명 중 1명이 어떤 식으로든 반도체 제조에 관여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밖에 256KB와 1메가비트 메모리 칩을 개발하는 명령을 받은 기업도 있다. 이 기업은 에정보다 이른 1987년 256KB 메모리 칩 개발에 성공했지만 대량 생산을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88년 9월 다른 기업이 1메가비트 메모리 칩 첫 샘플인 U61000을 선보이는데 성공했다. 호네커 서기장은 이에 대해 동독이 선진공업국으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확신시켜주는 증거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결국 동독 기업은 반도체를 양산할 수 없었고 드레스덴은 1988년부터 1989년 불과 3만 5,000개 칩만 생산했으며 수율은 불과 20%였다. 더구나 1988년 11월에는 도시바가 4메가비트 DRAM 대량 출하를 시작하고 1989년 3월까지 월 생산 개수를 100만 개로 확장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당시 동독 경제는 엉망이었고 1990년 초에는 채무 불이행에 빠질 것으로 보였다. 더구나 1989년 5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하면서 동독인은 서독으로 향하기 위해 헝가리를 통과할 수 있게 됐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다.
동독 반도체 제품은 기술적으로 막히게 됐지만 사회적 유산은 지금도 남아 있다. 드레스덴에 투자된 수십억 마르크 자금으로 인해 드레스덴은 이제 유럽 최고 실리콘 제조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난 8월 초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인 TSMC가 드레스덴에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