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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달러 기업, 엔비디아의 비공식 슬로건

엔비디아는 고성능 GPU를 개발하는 반도체 기업이다. GPU는 이전에는 게임이나 CG 분야 등에서만 사용됐지만 최근에는 AI 연구나 HPC 등 분야에서도 사용되며 이런 GPU 수요 증가에 따라 엔비디아 존재감도 커지고 있다. 이런 엔비디아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젠슨황(Jensen Huang) 엔비디아 공동 창업자 겸 CEO는 1963년 대만에서 태어나 9살 때 미국 워싱턴주로 이사해 삼촌과 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삼촌 추천으로 켄터키주에 위치한 기숙사 학교인 OBI(Oneida Baptist Institute)에 들어갔다. 삼촌은 이곳을 명문 기숙학교라고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소행이 불량한 학생이 만힝 재적하고 있었다고 한다. 젠슨황 룸메이트는 문자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젠슨황은 룸메이트에게 글을 읽는 법을 가르치고 대신 룸메이트는 젠슨황에게 벤치프레스를 꼽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당시 젠슨황은 OBU 수업을 받기에는 너무 어려서 근처 공립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아시아계인 그는 곧 왕따가 됐다. 그는 왕따 경험이 회복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고 후일 회상하기도 했다.

젠슨황이 미국으로 이주한지 몇 년 뒤 부모도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후 오레곤주에 정착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전국 클래스 탁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수학이나 컴퓨터 기술을 배우는 클럽 활동에도 전념했다. 젠슨황은 고등학교 2학년을 넘어 16세 오레곤주립대 전기공학부에 입학했다.

오레곤주립대 전기공학부에는 학생 250명이 재적하고 있었고 이 중 여학생은 불과 3명이었다고 한다. 젠슨황은 여학생 중 1명인 로리 밀스와 사랑에 빠졌고 밀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대학 졸업 이후 이들은 실리콘밸리에서 마이크로 칩 설계 직업을 맡았고 몇 년 뒤 결혼했다.

1993년 젠슨황은 크리스 말라초스키(Chris Malachowsky), 커티스 프리엠(Curtis Priem)과 함께 회사를 설립했다. 3명이 설립한 기업은 기획 단계에선 엔비전(NVision)이라고 불렸지만 엔비전은 화장지 제조사 이름이었다. 젠슨황은 라틴어로 질투를 의미하는 단어(invidia)를 이용해 사명은 엔비디아(NVIDIA)로 결정했다.

엔비디아 설립 당시 게임 업계에선 다각형을 취급하기 위한 전용 칩이 요구되어 엔비디아는 수요 대응을 위해 다각형 처리 칩을 개발했다. 당시 게임 업계에선 삼각 폴리곤과 사각 폴리곤 중 어떤 게 주류가 될지 정해지지 않았고 엔비디아는 사각 폴리곤 처리에 특화된 칩을 개발했다. 하지만 엔비디아가 첫 제품을 선보인 직후 마이크로소프트가 삼각 폴리곤만 대응하는 그래픽 소프트웨어를 릴리스했다. 이 때문에 엔비디아는 삼각 폴리곤 처리에 대응한 칩으로의 전환을 강요받아 직원 100명 중 절반을 해고해 자금을 확보해 삼각 폴리곤 처리 칩 생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엔비디아가 사운을 걸고 발표한 리바 128(RIVA 128)은 4개월 만에 100만 개가 팔릴 만큼 인기를 얻었다. 엔비디아는 이를 통해 사업을 계속할 수 있는 자금을 얻었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한 뒤에도 젠슨황은 몇 년간 자사는 30일 뒤에는 폐업한다(Our company is thirty days from going out of business)는 문구를 걸고 직원을 격려했다고 한다. 이 슬로건은 지금도 엔비디아의 비공식 슬로건이다.

엔비디아는 이제 AI를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인간 목소리를 AI가 모방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관심을 끌고 자동차와 의료 분야로도 AI 활용을 확대하고 있다. 젠슨황 CEO는 첨단 AI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는 앞으로도 AI 분야에서 기술적 리더십을 유지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석원 기자

월간 아하PC, HowPC 잡지시대를 거쳐 지디넷, 전자신문인터넷 부장, 컨슈머저널 이버즈 편집장, 테크홀릭 발행인, 벤처스퀘어 편집장 등 온라인 IT 매체에서 '기술시대'를 지켜봐 왔다. 여전히 활력 넘치게 변화하는 이 시장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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