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이라고 하면 코로나19를 떠올리게 되지만 수십 년 전 발생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이 있다. 바로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HIV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AIDS가 그것.
HIV와 AIDS에 대한 이해가 진행되고 예방과 치료 방법이 보급되어 왔지만 유엔 산하 UNAIDS에 따르면 전 세계 HIV 감염자 수는 2018년 기준으로 3,790만 명에 달하며 이 가운데 170만 명은 1년간 새로운 감염자였다. 다시 말해 지금도 하루 수천 명 속도로 매일 HIV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HIV가 코로나19와 다른 건 감염경로와 예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어 완치는 아니어도 치료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과 미국에선 HIV와 AIDS 전염병 종결을 내걸고 구체적인 수치 목표도 세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초 연두교서에서 1년 전 목표를 반복했다. 40년 전부터 계속된 미국 내에서의 HIV와 AIDS 유행을 2030년까지 끝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실현 가능하게 생각되지 않을 만큼 멋진 목표다. 트럼프 정권이 지금까지 HIV 관련 프로그램이나 의료계 시책을 잘라내 왔다는 감안하면 더 놀라운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공중위생 전문가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2030년까지 HIV와 AIDS를 사실상 박멸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HIV 감염자는 현재 전 세계에서 3,79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치료로 완치할 전망이 아니라 HIV와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 다만 HIV가 무서운 건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AIDS를 일으키는 것이지만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이 발달하면서 AIDS 발병보다 훨씬 이전 단계에서 진행을 방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항레트로바이러스약물은 이미 상당 기간 전부터 이용되어 왔다. 지금은 HIV 감염 초기에 치료를 시작하면 감염자로 비감염자와 거의 같은 수명을 살 수 있게 됐다. 또 대부분 치료를 받는 HIV 감염자는 혈중 HIV 농도가 낮기 때문에 타인에게 감염시킬 가능성도 낮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HIV 감염자와 접촉하는 사람이 감염 예방 목적으로 사용할 예방약 PrEP(pre-exposure prophylaxis)도 있다. PrEP는 몇 가지 항레트로바이러스약물을 조합해 저렴한 비용으로 물론 완전히 HIV 감염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매일 지시대로 약을 먹고 있다면 감염 위험을 99% 낮출 수 있다. 더구나 HIV를 포함해 성병 확산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콘돔도 있다.
HIV 감염 경로 중에는 주사기를 돌려 쓰는 것도 있지만 이를 차단하면 HIV 확산 예방에 도움이 된다. 마약 단속을 강화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용한 주사기에 대한 대가로 새로운 주사기나 알코올 솜 등 관련 제품을 제공하는 형태가 될 수 있다.
약물을 장려한다는 건 아니다. 적어도 HIV 확산 위험을 줄일 수 있고 실제로 이런 프로그램에서 약물 사용 증가 같은 악영향을 제한적이라고 한다.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은 약물 이용자와 의료 시스템을 연결해주는 측면도 있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용자가 HIV 검사를 받을 필요가 생기면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여러 대책은 1980년대부터 이어진 유행을 차단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중시되는 건 숨겨진 HIV의 경우 그 중에서도 고위험 그룹을 검사해 발견하는 것과 감염자가 치료를 받는 지원을 해 확산 상태로 가지 않도록 하는 것, 또 사회적 약자가 HIV에 걸릴 위험을 낮춰주는 것이다.
2016년 유엔은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HIV 유행을 종식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여기에는 2030년까지 신규 감염자 수를 매년 20만명 이하로 하고 감염자 중 95%가 자신의 감염 여부를 파악하게 하는 걸 담았다. HIV 양성자 중 95%는 치료를 받고 치료 중인 사람 중 95%는 바이러스를 완전히 억제하는 걸 목표로 한다. 미국 뉴욕시 등은 더 높은 목표를 내걸고 있다. 2014년 뉴욕 주 당국은 AIDS 퇴치를 위한 이니셔티브를 발표하고 2020년까지 이어질 타임라인을 설정했다. 뉴욕에서 이 같은 시책이 잘 진행된 건 저소득층 보험 제도(Medicaid)를 통해 자금을 제공해 PrEP를 이용하기 쉽게 한 점, 간호사에 의한 성병 검사 가능, 저렴한 비용이나 무료로 검사와 치료를 실시하는 클리닉에 보조금을 지급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시책은 주로 HIV 위험이 높은 동성애자나 유색 인종 커뮤니티 등을 대상으로 한다.
이 프로그램은 2018년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을 기한으로 한 뉴욕시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목표치는 뉴욕시민 6만 5,000명이 PrEP를 받아 신규 감염자 수를 연간 750건 이하로 억제하고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받는 환자 중 85% 이상에서 바이러스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정권의 2030년 이니셔티브는 2020년 2억 9,100만 달러 자금을 확보했지만 프로그램은 아직 초기 단계다. 또 미국 의료 시스템 전체에서 HIV 환자 치료 비중은 아직 높지 않다. 영국과 캐나다 등 전 국민 보험 제도를 갖춘 국가와 비교하면 미국에서 HIV 환자 바이러스 억제율은 낮은 상태인 것.
바이러스 억제율이 오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에서 HIV 치료비가 굉장히 높다는 것도 한 몫 한다.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 CDC는 HIV 생애 의료비를 48만 5,500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부담 대부분은 보험사와 조성 프로그램이 커버하지만 자기 부담액도 많아 환자가 약물량을 자기 판단으로 줄이거나 약을 사는 걸 포기하기도 한다. 2019년 연구에선 HIV 환자 중 7%가 약물 비용을 이유로 처방 내용을 준수하지 않고 14%는 비용 부담을 줄이려고 다른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HIV 치료제는 당분간 저렴하지 않다. 2월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 초기 비용은 2012∼2018년까지 34% 증가했고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보다 10배에 달한다. PrEP 비용 역시 HIV 근절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1개월분이 2,000달러에 달한다. 보험이 있어도 자기 부담액이 큰 경우가 많고 장기적으로 계속 어려운 구조다. 이런 가격은 공공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물론 개선 조짐도 보인다. 2021년 미국 보험사는 환자 부담 없이 PrEP를 커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정부 자문기관은 PrEP가 널리 제공되는 예방 서비스라고 권고했다. 미국 내 보험 제도(Medicare for All) 같은 게 만일 성립된다면 필요한 의료는 정부가 보험으로 커버해주는 상태가 될 수 있고 PrEP나 항레트로바이러스 약물 등 비용 절감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2000년 초반 HIV 감염이 많은 아프리카에서 극적으로 감염이 줄었지만 2019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유엔이 2020년 내걸었던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는 전망과 2030년까지 목표도 이대로는 무리라고 한다. WHO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전 세계적으로 170만 명이 새로 HIV에 감염됐다.
HIV 박멸에 발목을 잡는 건 자금 부족이다. 유엔은 회원국이 2020년까지 이 프로그램에 연간 260억 달러를 낼 걸 요청했다. 하지만 2018년 유엔이 받은 건 190억 달러로 전년보다 10억 달러 줄었다. 유엔이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HIV 확산 방지에 1달러를 걸 때마다 경제 효과는 2달러에서 6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WHO의 2018년 보고서에 따르면 아프리카와 아시아, 미국 등 12개국에서 HIV 양성 환자 중 10% 이상에서 2종류 HIV 약물 내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발견됐다고 한다. 약제 내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환자 중 10%에 퍼진 경우 같은 약을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 사용하면 내성이 증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당분간은 문제가 없더라도 향후 치료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HIV를 완전히 박멸하려면 백신을 개발하는 게 좋다. CRISPR 같은 유전자 편집 기술은 바이러스 자체를 대상으로 할 수 있고 인간 면역세포를 강화하고 HIV 감염을 방지하는 간접적 방법도 있다. 또 약물 복용 간격을 몇 주 혹은 몇 개월로 두는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도 개발 중이다.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임상 시험 3단계에 도달한 상태다. 이들 방법은 내성이 만들어지는 위험을 줄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HIV 박멸을 위한 최대 과제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 주사기 교환 프로그램 같은 중요 시책은 활용이 불충분하거나 빈곤과 제약업계의 탐욕에 의해 생명을 구할 약이 대중화되기 어려워지는 측면도 있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