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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원자로 개발은 어떻게 진행됐을까

핵연료를 사용한 핵분열 연쇄 반응에 의해 엄청난 전력을 만들어내는 원자로는 미국 내에서 어떻게 발전하게 됐을까.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로가 탄생한 건 1942년이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유대인 배격 움직임이 강해지자 미국에 망명한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시카고 대학에서 CP-1(Chicago Pile 1)을 만들어 핵분열 연쇄 반응 제어에 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나치 정권 하 독일 연구 속도를 앞서게 된 것.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원자력 연구는 주로 군에 의해 이뤄졌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계기가 된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수중 활동 일상화를 목표로 세계 첫 원자로를 탑재한 잠수함이 된 노틸러스, 원격지에서 전력 문제 해소를 목표로 한 소형 원자로 프로젝트(Army Nuclear Power Program) 등 미군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 다양한 종류 원자로 개발에 착수했다.

원자로 개발에 민간이 참여하게 된 계기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결 이후 미국과 소련은 경쟁하듯 핵개발을 했고 일본에 투하한 원자폭탄보다 1,000배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을 만들어낸다. 1953년 1월 취임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냉전에서 핵전쟁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유엔총회에서 밝히고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전 세계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호소한 것이다.

1954년 아이젠하워 정권 하에서 원자력 에너지법이 수정되면서 미국에선 상업적인 원자력 개발이 합법화된다. 같은 해 세계 첫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시작되고 1958년 운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 원자력 발전 비용은 같은 규모 화력발전소 10배였고 열 변형에 의한 가압기 증기 밸브 고장이나 응력 부식, 균열에 의한 증기 발생기 누설, 진동에 의한 수분 분리기 손상, 과도한 핵분열 발생 등 자잘한 사고가 빈발했다. 운전을 취소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당시 원자력 발전의 현실은 경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수많은 공공 사업자가 주저하는 가운데 매사추세츠주 전력회사 11곳이 컨소시엄으로 건축한 양키로(Yankee Rowe) 원자력 발전소가 1960년 운전을 개시했다. 이 발전소는 견적 가격 23% 이하 건조비로 완성하고 건설할 때에도 운용할 때에도 문제가 없어 미국 내 원자로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줬다. 양키로 원자력 발전소 운전 예정 기간은 불과 6년으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결국 폐지 조치가 실시될 때까지 약속된 기간보다 5배 이상에 해당하는 31년간 운전을 계속했다.

또 양키로 원자력 발전소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너럴일렉트릭도 완전히 민간 자본 원자로인 드레스덴 원자력 발전소 운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드레스덴 원자력 발전소는 주식 소유자에 대한 장기적인 이익, 민간 기업 시스템에 대한 책임, 미국 국익에 기여를 목적으로 건설하고 있으며 계획 단계에서 적자가 예상되고 있었다. 의외로 드레스덴 원자력 발전소는 화력 발전소에 필적하는 비용으로 전력을 생산했지만 방사능에 의한 오염이나 임계사고 위험에 끊임없이 직면하고 있던 다른 1970년대부터 1996년 사이에 25개 사건 사고를 일으켜 160만 달러 벌금이 부과된 것도 문제였다.

이어 탄소 퇴적물에 의해 운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유기액냉각로 OCR(Organic Cooled Reactor), 중수를 이용한 방식(Carolinas–Virginia Tube Reactor) 등 다양한 유형 원자로가 개발됐지만 전반적으로 1965년에는 화력 발저소와 경쟁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국민적 관심 고조와 당시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1970년대에는 여러 건축 계획이 좌절되고 다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궤도에 오르게 된 건 1985년 경이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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