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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명령에…마이크로소프트, 국제형사재판소 직원 메일 계정 정지

지난 5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시한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재에 따라 마이크로소프트가 ICC 카림 칸 주임검사 이메일 계정을 정지했다. 이런 사태에 따라 EU 정부기관과 기업이 미국 기술 기업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2024년 11월 ICC는 이스라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 요아브 갈란트 전 국방장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지배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조직 하마스 알 카삼 군사여단 최고사령관 데이프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ICC 체포영장 발부로 네타냐후 총리 등은 공식적으로 전쟁범죄 용의자가 됐다.

이 결정에 대해 ICC 비가맹국인 미국 정치인으로부터 비난이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ICC 측 체포영장 발부는 미국과 긴밀한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한 불법적이고 근거 없는 행위라며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과 함께 칸 주임검사에 대한 제재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5월에는 칸 주임검사의 마이크로소프트 이메일 계정이 정지되어 스위스에 기반을 둔 프로톤(Proton)으로 이메일 계정을 전환했다고 보도됐다. 칸 주임검사는 모국 영국 은행계좌까지 동결된 상태라고 하며 ICC 관련 재판의 증거수집과 증인 찾기를 담당하는 NGO 직원도 트럼프 정부 제재를 우려해 미국으로부터 자금을 이동시키고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정부기관과 기업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트럼프 대통령 명령에 따라 ICC 직원에게 제재를 가한 건 유럽 각국 정책입안자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보도에선 이는 단순한 이메일 계정 하나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중대한 문제에 대한 경종이 됐다며 트럼프 정부가 미국이 보유한 기술적 우위를 활용해 네덜란드 같은 동맹국을 포함한 반대파를 제재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국방부 전 사이버보안 책임자이며 현재 유럽의회 의원인 바르트 흐루하이스는 ICC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더 이상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과거 미국 기술 기업을 지지했던 흐루하이스도 생각을 180도 바꿔 유럽 각국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는 칸 주임검사 이메일 계정 정지는 ICC와 협의 하에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 브래드 스미스 사장은 ICC 문제는 이미 타고 있던 불에 기름을 부었다며 일련의 우려는 미국과 유럽 간 신뢰관계가 손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ICC 사례는 유럽 각국의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얼마나 미국 기술 기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벗어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덴마크 전 외교관이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카스퍼 클링에는 미국 정부가 특정 조직이나 국가, 또는 개인을 추적하면 미국 기업은 따를 수밖에 없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미국 기업은 유럽 고객을 안심시키려 노력하고 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사티아 나델라 CEO도 6월 네덜란드를 방문해 지정학적으로 불안정한 시대 법적 보호와 데이터 보안을 포함한 유럽기관 전용 솔루션을 발표했다. 하지만 많은 정부기관과 기업이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는 유럽 프로바이더와 협력한 해결책을 찾고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 내무부 디지털화 담당 장관 에디 판 말름은 디지털 자립성과 주권이라는 과제는 중앙정부의 최대 관심사가 됐다고 밝혔다.

또 덴마크에서는 디지털부가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대체 제품을 시험적으로 도입하고 있고 독일 일부 주에서도 마이크로소프트 제품 사용 감축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유럽위원회는 미국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낮은 새로운 AI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 구축을 향해 대규모 투자를 실시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상황은 유럽 기술 기업에게는 미국 라이벌 기업으로부터 고객을 빼앗을 기회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장조사회사 시밀러웹 데이터에 따르면 최근 몇 달간 유럽 기반 이메일과 메시징, 검색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고 한다.

프로톤 앤디 옌 CEO는 미국 기업에 의존하는 상황은 지속가능하지 않다며 유럽 각국 정부는 더 자립적이고 회복력 있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네덜란드 인터맥스그룹(Intermax Group)과 스위스 엑소스케일(Exoscale)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 프로바이더는 신규 사업 급증을 보고했다. 인터맥스 CEO인 루드 바우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이들이 미국 기업은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말했지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했다.

한편 이미 미국 기술 기업이 너무 큰 힘을 갖고 있어 근본적으로 분리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미국 디지털 권리 옹호단체인 전자프론티어재단 빌 버딩턴은 푸시 알림이나 웹사이트를 뒷받침하는 콘텐츠 배포 네트워크, 인터넷 트래픽 라우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미국 기업과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권리 활동가 로빈 버종은 시장이 너무 지배적이 됐다며 규제도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의 유럽 내 우위를 무너뜨리려면 정부 차원 규제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관련 내용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석원 기자

월간 아하PC, HowPC 잡지시대를 거쳐 지디넷, 전자신문인터넷 부장, 컨슈머저널 이버즈 편집장, 테크홀릭 발행인, 벤처스퀘어 편집장 등 온라인 IT 매체에서 '기술시대'를 지켜봐 왔다. 여전히 활력 넘치게 변화하는 이 시장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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